서사의 위기
책 소개
현대인은 정보와 소통에 도취되어 몽롱하다. 한병철 교수는 서사의 위기의 원인으로 정보의 지배를 지목한다. 근대의 정보 과포화로 시작하여, 자본사회와 신자유주의에 의해 형성된 정보체계는 서사의 시공간적 구조를 해체하고 이야기를 몰락시킨다. 이야기로서의 스토리텔링은 현대의 소비주의적 삶의 형식내에서 스토리셀링이 되었다. 이야기와 광고는 구분하기가 불가능하다. 이것이 서사의 위기다.
정보의 무간격성과 과잉활동성은 가용성∙예측가능성∙놀라움의 자극을 요구하며, 이야기가 가지는 원격성, 관조적 머무름, 시간적 폭과 깊이, 시작과 끝의 종결형식, 그리고 서사적 장력을 해체함으로써 세계를 탈아우라하고 탈신비화 한다. 세계의 모든 의미는 벗겨지고, 존재마저 의미가 제거된다. 더 이상 세계의 비밀과 신비로움은 없다. 세계는 빈곤해진다.
정보체계는 자유와 소통의 탈 속에 숨어 스마트한 지배의 형식으로 우리를 지배하면서 우리의 자유를 철저히 혹사시킨다. 정보의 스마트한 지배는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의견∙필요∙선호를 소통하라고, 삶을 서술하라고, 게시하라고, 공유하라고, 링크를 걸라고 요구한다. 바로 스토리 중독 시대에 서사의 위기가 있다.
현대인은 곧 사라져 버릴 정보에 휩쓸려 자신만의 이야기를 말하지 못하고 입력한 정보를 앵무새처럼 내뱉는 사회의 끝에서 이야기 없는 신야만인의 텅빈 삶, 벌거벗은 삶, 생존의 삶을 살 뿐이다. 현시점에서 다음 시점으로, 하나의 위기에서 다음 위기로, 하나의 문제에서 다음 문제로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다니며 생존을 위해 마비된다.
디지털 플랫폼에서 삶은 서사적 맥락 없이 그저 접속사로 연결된 채 나열될 뿐, 어떠한 긴 삶의 이야기도 직조되지 않는다. 이제 현대인은 서사의 위기 속에서 이야기의 형식으로 된 지식∙경험∙조언∙지혜∙비전∙역사성∙에로티시즘∙예술∙이론∙정치 그리고 세상을 바꾸는 이야기를 할 용기와 행복 마저도 상실해 간다.
디지털은 지각을 나르시즘화하여 공동체적 가치와 규범을 체화시키는 모든 상징을 약화시킴으로써 공동체도 침식된다.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공동체 이야기는 자기실현의 모델인 개인 서사로 분해되어 간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공동체 형성 서사의 생성을 방해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숭배를 좋아하고 스스로가 지도자인 곳, 모두가 스스로를 생산하고 스스로를 공연하는 곳에는 안정적인 공동체가 형성되지 않는다. 과도하게 급증하는 개인서사 공동체를 잠식한다. 그 결과로 우리에겐 공동체를 구축하고 의미를 형성하는 이야기가 매우 부족하다.
서사적 성찰을 상실한 현대인은 편리함 또는 ‘좋아요’에 예속된 정보사냥꾼이자 포노-사피엔스(phono sapiens)가 되어 구원을 필요로 하는 호모 사피엔스를 뒤에 버려둔 채 앞으로 나아간다. 포노-사피엔스는 스마트폰에서 자발적으로 착취 당하고 제어 당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게시하고 ‘좋아요’를 누르고 공유하면서 벌거벗은, 공허해진 삶의 의미를 모르는 척 한다.
삶은 이야기다. 인간은 새로운 삶의 형식을 서사적으로 실현시키는 서사적 동물(animal narrans)이다. 이제 우리는 ‘벌거 벗은 삶을 사느냐, 아니면 이야기하느냐’를 선택해야 한다.
저자 한병철 교수
한병철 교수는 대한민국 서울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에서 금속공학을 전공했다. 22세 때, 그는 한국의 폐쇄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금속공학이나 공부하는 삶을 피하고자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독일에 도착해 프라이부르크 대학교과 뮌헨 대학교에서 가톨릭 신학, 독일어문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1994년에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하이데거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0년에 바젤 대학교에서 데리다에 관한 논문으로 교수 자격을 취득했다. 그 후 바젤 대학에서 철학과 사강사로 재직했다. 2010년에 독일 카를스루에 조형예술대학교의 철학/미디어학 교수로 임용되었으며, 2012년부터 2017년까지 베를린 예술대학교에서 철학 및 문화학 교수로 재직했다. 주요 연구분야는 18세기~20세기 철학, 윤리학, 사회철학, 현상학, 문화철학, 미학, 종교철학, 미디어철학 등이다.
우리나라에서는 2011년 12월 ‘권력이란 무엇인가’가 번역돼 출간되면서 처음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2012년 3월에 주 저서인 ‘피로사회’가 번역 출판되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작가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출판사 서평
오늘날 우리는 혼자 있을 때도, 다른 사람을 만나 대화할 때도 쉴 새 없이 스마트폰을 들여다본다. 실시간 뉴스를 확인하고 유튜브와 SNS로 짧은 영상과 사진을 읽어 들인다. 길고 느린 호흡으로 내면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시간은 사실상 없다. 온종일 자극적인 스토리를 소비하느라 바쁘다.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세계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살아 있는 철학자”(스페인 대표 일간지 〈엘 파이스〉)인 한병철은 신작 『서사의 위기』에서 스토리에 자기만의 고유한 이야기를 빼앗긴 현시대를 ‘서사의 위기’라고 진단한다. 반짝하고 사라질 스토리는 그 어떤 삶의 방향도, 의미도 제시하지 못하기에 서사의 위기는 삶의 위기로 직결된다. 저자에 따르면 인간은 한 순간에서 다음 순간으로 이동하며 사는 존재가 아니다. 탄생과 죽음 사이의 삶 전체를 연결하며 자기만의 맥락으로 나아갈 때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나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하는 이야기만이 인생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만 중요하게 만드는 스토리에 중독될수록 깊은 허무에 빠지는 이유다.
‘서사의 위기’는 한국 사회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겪고 있는 현시대의 문제다. 이 책을 먼저 읽은 해외 독자들은 “훌륭하고 정확하며 거의 완벽한 책”, “우리 시대의 재앙을 파악하는 동시에 해결책을 제시한다”, “현재 우리 삶의 일부여서 못 보던 문제들을 예리하게 짚어내어 보게 해준다”라고 극찬하며 시대를 꿰뚫는 한병철 철학의 예리함을 반증하고 있다.
『서사의 위기』에서 한병철은 철학자 발터 벤야민, 한나 아렌트, 테오도르 아도르노부터 작가 게오르크 뷔히너, 베르톨트 브레히트, 폴 마르, 미하엘 엔데까지 다채롭게 인용하며 서사의 의미를 해석한다. 나아가 서사의 회복만이 예측 불가능한 세계에서 불안에 떨지 않고 사는 방법이라고 강조한다. 남들 다 하는 대로 공허하게 끌려가는 게 아니라 자신만의 맥락으로 고유한 인생, 다른 이야기를 만드는 삶이다. 한병철 특유의 깊고 명료한 철학적 사유는, 인생의 의미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독자들이 내면의 서사를 회복해 삶의 가치를 온전히 음미하도록 이끈다.
책 속으로
우리는 온통 넘쳐나는 정보로 둘러싸여 있다. 간혹 무수하게 쌓여 진 맥락을 알기 힘든 파편적인 정보 더미에 파묻혀 숨쉴 틈을 찾기 어려운 지경에 놓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 정보는 우리 시대에 ‘생존‘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정보가 빠른 자가 좀더 앞으로 나아가는 자이고 뒤쳐지는 순간 우리는 패배의 늪에 매몰될지도 모른다는 정체가 불분명한 불안감을 누구나 어느 정도는 가지고 있지 않을까.
한병철 교수의 <서사의 위기>는 그 제목과는 다르게, 오히려 어느 정도 큰 숨을 쉴 여유를 선사해 줄 수도 있다. 서사적 삶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와 가치는 몇몇 책을 통해 알고는 있겠지만, 역시나 명쾌한 그의 진단은 좀더 문제의 근본을 들여다 보게 해준다.
그에 따르면 ‘정보‘란 무간격성의 자연적 발현, 오로지 순간의 시점에만 사로잡히며 새로운 동안에만 가치가 있고 그 순간에만 살아있는 개념을 가진 단어이다. 그렇기에 정보에만 의존한다면 우리는 숨이 턱에 차도록 연속적으로 정보를 모으며 매달릴 수밖에 없다. 반면, 시공간적 관계에 의해 태어나는 ’이야기’는 정보를 내주지 않는다. 그 이야기 속의 ’틈’으로 서사적 긴장이 고조되며 우리는 생각을 하고 관계를 맺으며 변화를 꿈꾸고 새로운 시작을 기대할 수 있다.
인류는 전체주의의 아픔이 새겨진 벽을 넘어 포스트모더니즘의 규정되지 않은 다양성을 찬양하는 시대로 넘어왔다. 이 흐름이라는 것은 언제나 그렇듯, 넘칠 듯 과해지다가 반대편으로 돌아서며 갈등이 해소되고는 다시 또 차오르며 어느 순간 다시 넘칠 듯 과해진다.
한병철 교수는 이제 우리 인류가 ‘규정되지 않은 다양성‘의 극한에 다다랐다고 진단한 것일까? 신자유주의적 성과 서사로 인해 소비중심적 풍조로 치달으며 다른 온갖 것들을 잃어가는 우리의 모습에 대한 해결책 중 하나로 그는 ‘보편성으로의 회귀‘를 제시한다.
모든 사람, 모든 국가를 포용해 이들을 하나의 세계 공동체로 통섭하는 칸트의 ’세계시민법‘과 ‘보편적 환대‘를 그 예로 든다. 모든 인간이 무제한의 환대를 누릴 수 있는 세상……. 참으로 현실과는 거리가 있는, 이상으로 가득 찬 해결책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막강한 시작의 힘을 가진 ‘이야기‘가 절실히 필요한 우리들은, 과연 이 ’이야기’와 ’광고’를 구분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이 소비로 환원되며 소비주의적 삶의 형식만을 전제하는 스토리텔링의 세상에서 우리의 구세주인 ’이야기’를 구별해낼 수 있을까? 이것이 참 어렵습니다. 우리가 정신을 다잡고 있지 않는 이상, 모든 것은 뒤엉키며 소비지향적 세계로의 매몰만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것, 바로 이것이 스토리 중독 시대의 ’서사의 위기’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정보에 치여 불안감 속에서 살아가면서, 또한 스토리셀링으로서의 스토리텔링에 중독되어 가면서, 혹은 보여지는 과한 소통의 네트워크 안에서 길을 잃어가면서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던 어떤 것들이, 이 책을 읽으며 하나 둘씩 떠오를 수 있다.
현재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준 자신의 과거의 역사들, 자신이 가고 싶은 방향에 대한 오랜만의 사색들, 과한 소통에 반하는 침묵에 의한 고요한 조화로움, 타자에 대한 나의 태도를 돌아보는 시간들을 갖게 하는 것이다.
현실적 결론
저자가 풀어놓은 이야기 보따리들 중, 모모에 대한 이야기가 특히 인상적이다.
‘경청에서 중요한 것은 전달되는 내용이 아니라 사람, 즉 타자가 누구인가다. 모모는 자신의 깊고 다정한 시선을 통해 타자를 그 사람의 타자성 안에 그대로 둔다. 이는 수동적인 상태가 아닌 능동적인 행위다. 경청은 상대에게 이야기할 영감을 주고, 이야기하는 사람 스스로 자신을 소중하다고 느끼고,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심지어 사랑받는다고까지 느끼는 공명의 공간을 연다.’ (p118-119)
깊고 다정한 시선을 통해 타자를 그 사람의 타자성 안에 그대로 두는 행위. 언뜻 쉬워 보이지만 절대 쉽지 않을 이 행위를 생각해보며, 타자에게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겠다 싶은 생각도 들게 한다.
진심어린 경청은 서사 창출의 시작점이라 생각된다. 경청이 단순히 상대의 말을 열심히 듣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경청하는 사람보다 이야기하는 사람에게 더 큰 의미가 있는 건지도 모른다. 이야기하는 사람 스스로가 자신이 소중히 여겨지고 사랑받고 있다고까지 느끼게 될 정도라니… 상대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지켜봐주는 행위의 힘이 이토록 대단한 영향력을 가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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